1945년 8월 15일, 해방됐지만 정부가 출범한 날은 아니었어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발표하면서 한국인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어요. 하지만 이날 곧바로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는 한국 정부가 출범하지는 않았어요.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당시 사진과 설명에서도 8월 15일은 해방의 순간으로, 9월 9일은 서울의 조선총독부에서 일본군의 항복문서 조인과 미군정이 시작된 시점으로 구별해요. 국사편찬위원회 ‘해방과 일상’

연합국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려고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남쪽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로 했어요.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7일 미군 사령부가 군정 실시를 선포했고, 9월 9일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 뒤 통치권을 행사했어요. 당시 포고 제1호에는 미군정이 38도선 이남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고 명령과 법령을 공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국사편찬위원회 ‘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
광복과 정부 수립 사이의 공백은 단순히 행정 준비가 늦어진 기간이 아니에요. 식민 통치는 끝났지만, 어떤 절차로 누구에게 통치권을 넘기고 어떤 형태의 독립 정부를 만들지 결정해야 했던 점령기였어요.
통일 정부 협상은 왜 실패했을까요
미국·영국·소련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이를 준비할 임시 민주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안을 마련했어요. 그러나 협의에 참여시킬 한국 정치·사회단체의 범위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충돌했고, 한반도 안에서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찬반 대립이 커졌어요.

두 차례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정부 수립 절차에 합의하지 못했어요. 냉전까지 본격화되자 미국은 1947년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어요.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선거를 실시하고, 선출된 대표가 국회와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는 결의 제112호를 채택했어요. 유엔 디지털도서관 결의 제112호
처음부터 남한만의 정부를 만들기로 정했던 것은 아니에요. 유엔 결의는 한반도 전체의 선거를 목표로 삼았지만, 소련이 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결국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 선거를 진행하도록 결정했고, 선거 범위는 38도선 이남으로 제한됐어요. 국사편찬위원회 ‘남한만의 총선거 결의안’
이 결정에 남한에서도 반대가 나왔어요. 단독 선거가 분단을 굳힐 수 있다고 본 김구·김규식 등은 남북협상을 추진했고, 제주에서는 선거 반대와 탄압이 제주 4·3의 비극과 얽혔어요. 1948년의 과정을 단순히 ‘해방 뒤 자연스럽게 정부가 만들어진 과정’으로만 보면 당시의 갈등과 분단이라는 결과를 놓치게 돼요. 국사편찬위원회도 5·10 총선거가 제헌의회를 구성한 토대인 동시에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수령이 되었다고 설명해요. 국사편찬위원회 ‘제헌 국회 의원 선거법’
선거부터 정부 출범까지의 순서
1948년 봄부터는 정부를 구성하는 절차가 빠르게 이어졌어요.

| 날짜 | 사건 | 의미 |
|---|---|---|
| 1948년 5월 10일 | 국회의원 총선거 | 제헌국회를 구성할 대표 선출 |
| 1948년 5월 31일 | 제헌국회 개원 | 헌법과 국가 조직을 만들 국회 출범 |
| 1948년 7월 12일 | 헌법 의결 | 제헌국회가 대한민국헌법 확정 |
| 1948년 7월 17일 | 헌법 공포·시행 | 민주공화국의 통치 원리와 국가기관 규정 |
| 1948년 7월 20일 | 대통령·부통령 선출 | 국회가 이승만과 이시영 선출 |
| 1948년 8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 새 정부의 출범을 국내외에 선포 |
5·10 총선거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참관한 가운데 남한에서 실시됐고, 선출된 의원들은 5월 31일 제헌국회를 열었어요. 국사편찬위원회 ‘5·10 총선거’
제헌국회는 7월 12일 헌법을 의결하고 7월 17일 공포했어요.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국회·정부·법원의 권한과 국민의 기본권을 정했어요.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남은 제헌헌법 원문에서도 제정일과 시행일이 1948년 7월 17일임을 확인할 수 있어요.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헌법’
국회는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어요. 이어 행정부를 구성했고 8월 15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열었어요. 이날 발표된 대통령 기념사는 1948년 9월 1일 발행된 제1호 관보에도 실렸어요. 국가기록원 ‘정부수립 대통령 기념사’
정부 수립은 선언 한 번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어요. 선거로 대표를 뽑고, 국회가 헌법을 만들고, 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행정부를 구성한 뒤 정부 출범을 선포한 일련의 절차였어요.
정부수립일도 왜 8월 15일이었을까요
1948년 정부수립 선포식을 8월 15일에 연 것은 광복 3주년과 새 정부의 출범을 연결하기 위해서였어요. 같은 날짜에 우연히 두 사건이 겹친 게 아니라,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새 정부가 이어받는다는 상징을 담은 선택이었어요.
이듬해인 1949년에는 두 의미를 하나의 국경일에 함께 담았어요. 국가기록원은 광복절의 취지를 1945년 국권 회복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함께 경축하는 것으로 설명해요. 같은 해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은 8월 15일의 명칭을 ‘광복절’로 정했어요. 국가기록원 ‘광복절’ 국가법령정보센터 ‘국경일에 관한 법률’
그래서 오늘의 광복절에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이어지는 두 사건이 들어 있어요.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광복
- 1948년 8월 15일: 헌법에 따라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 선포
1948년 정부 수립과 1919년 임시정부의 관계
‘1948년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와 법통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은 아니에요. 제헌헌법 전문부터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혔어요. 현행 헌법 전문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어요.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헌법 연혁’
다만 ‘대한민국이 언제 세워졌는가’라는 질문에는 임시정부 수립, 국가의 법통, 해방, 헌법 제정, 정부 출범 가운데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설명이 제시돼 왔어요. 이 글에서 말하는 1948년 8월 15일은 그 논쟁 전체의 결론이 아니라, 제헌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행정부를 구성한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을 선포한 날짜를 가리켜요.
두 번의 8월 15일 사이에 있었던 3년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래요. 광복으로 식민 지배는 끝났지만 미·소 점령과 통일 정부 협상의 실패를 거친 뒤에야, 남한에서 선거·제헌국회·헌법 제정이라는 절차를 밟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