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6년 8월 30일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조선왕조실록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어요.
인정은 밤의 시작, 파루는 통행 재개의 신호
인정과 파루는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니라 도성의 문과 사람의 움직임을 바꾸는 신호였어요. 인정은 이경에 종을 28번 쳐 통행 제한을 알리는 시각이었고, 파루는 오경에 종을 33번 쳐 그 제한을 푸는 시각이었어요. 1528년 중종 때 기록에도 서울의 문을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연다는 규례가 명시돼 있어요. 부득이하게 문을 드나들 사람은 표신을 지녀야 했고요. 중종실록의 성문 개폐 기록

이를 현대 시계의 특정 시각에 그대로 맞춰 “매일 밤 몇 시부터 몇 시까지”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당시에는 밤을 경으로 나누었고, 계절마다 밤의 길이가 달랐기 때문이에요. 세종 16년인 1434년에는 새 물시계의 시각을 적용하면 봄·여름에는 인정이 이르고 파루가 늦으며, 가을·겨울에는 그 반대가 된다는 논의도 나왔어요. 이 기록을 보면 인정과 파루는 현대처럼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당시의 시각 체계와 계절 변화에 따라 운용됐어요. 세종실록의 누각과 인정·파루 논의
종이 울린 뒤 달라진 성문과 골목
통행 제한 시간에는 성문 밖으로 나가는 일만 금지된 게 아니었어요. 법령은 이경 뒤부터 오경 전까지 도성 안팎을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하고, 순관과 경수소가 단속하도록 했어요. 인정 뒤에는 군사가 목탁을 울리며 궁성과 경수소, 각 문을 돌았고 순관은 경마다 순찰했어요. 전록통고의 행순 규정

그렇다고 순라군이 도성의 모든 좁은 골목을 빠짐없이 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세종 11년인 1429년, 세종이 밤에 다니는 도적을 막으려고 순라군에게 구석진 곳과 좁은 골목까지 순찰하게 하자고 하자 대신들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했어요. 그 대신 일정한 장소를 지키는 경수소를 다시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어요. 세종실록의 야간 순찰 논의
조선의 밤을 ‘종이 울리자 모든 사람이 사라진 거리’로만 그리기는 어려워요. 규정상 통행은 제한됐지만 순라와 고정 경비가 함께 단속했고, 때로는 감시가 느슨해지기도 했어요. 1827년 기록에는 관리와 권세가의 수행인들까지 밤에 술에 취해 노래하고 다녔는데도 제지하지 않는다며 야금을 다시 엄격히 시행하라는 지시가 나와요. 비변사등록의 야금 단속 논의
급한 일이 있으면 밤에도 이동할 수 있었어요
조선의 야간 통행 제한에도 예외는 있었어요. 긴급한 공무, 질병, 사망과 장례에 관계된 일, 출산처럼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순관이나 경수소에 알린 뒤 이동할 수 있었어요. 이때 경수소 측 사람이 경첨을 가지고 동행하고, 목적지에서 신원을 보증받은 다음 날 병조에 보고했어요. 관청의 숙직 관리들은 승정원에서 통행표신을 받아 밤에 순찰할 수도 있었고요. 전록통고의 예외 통행 및 표신 규정

특별한 경우에는 통행 제한 자체를 잠시 풀기도 했어요. 같은 법령에는 순청에 통소기를 세우면 표신이 없는 사람도 밤새 통행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어요. 평상시에는 야간 통행을 제한했지만, 국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밤의 운영 방식을 바꿀 수 있었던 셈이에요.
시간을 알리고 치안을 지킨 조선의 통행금지
인정과 파루 사이의 규칙은 도성의 출입, 야간 순찰, 화재와 도적에 대한 대비를 하나로 묶은 도시 운영 장치였어요. 인정 종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인 동시에 성문과 경비 체계가 야간 상태로 바뀐다는 공적 신호였어요. 파루 종은 사람과 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신호였고요.
그래서 “조선 시대에도 통행금지가 있었나?”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어요. 다만 현대의 통금 시간을 과거에 그대로 대입하면 안 돼요. 조선의 야금은 경이라는 시간 단위, 성문 개폐, 순라와 경수소, 표신과 긴급 통행 절차가 결합된 도성의 야간 관리 제도였어요.
